<기획특집>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Platōn·BC 427년~BC 347년)은 ‘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전쟁의 끝은 죽은자에게만 있다.)’고 했다.

전쟁의 참혹상을 말한 것이다.  

인간의 삶과 영혼까지 처참하게 피폐시키는 전쟁은 ‘괴물’이다.     

<투데이경기>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한국전쟁 발발 70년 및 정전(휴전협정) 67년이 되는 2020년, 전쟁의 실상과 육성증언을 통해 6.25한국전쟁을 4회에 걸쳐 조명한다.- 편집자-  

보도순서 ① 6.25한국전쟁 ②UN군 미 스미스 부대, 오산 죽미령 초전 ③한날 떼제사 ‘오산 보도연맹 사건’ ④오산비행장(K-55)은 오산에 없다

③한날 ‘떼제사’ 오산(양민) 보도연맹 사건을 아시나요?

소련군 출신 북한 김일성이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을 앞세워 1950년 6월25일 새벽 남북군사분계선(38선)을 넘어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6·25한국전쟁.

남·북 쌍방에 엄청난 인명피해(사망 150만명·부상 360만명)는 물론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특히 오산(죽미령)은 UN군이 첫 전투에 참여한 곳이며, 당시 UN은 16개 나라로 이뤄진 연합군을 한국으로 파병했다.

전쟁은 그러나 군인 뿐 아니라 무고한 양민들까지 희생당하는 괴물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른바 보도연맹(輔導聯盟) 사건이다.

본래 이는 전쟁이란 급박한 상황에서 반공(反共)을 국시로 내건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와 군·경이 과거 좌익계 인사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살해한 이른바 양민학살사건이다.

► 참고사진-전국 곳곳에서 양민학살사건이 자행됐다.

당시 정부와 군·경이 전쟁 초기 과거 좌익에 관계된 인사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을 추정하거나 우려한 나머지 무고한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세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상적 문제와 무관했던 다수의 양민(良民)들이 희생양으로 목숨을 잃었다.

► 참고사진

참혹한 난리통에 군인도 아닌 무고한 그들이 대한민국 정부와 경찰에게 학살된 아이러니한 참극이다.

보도연맹은 좌익전향자들을 중심으로 1949년 조직된 반공교화단체로 좌익세력의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했다.

정식명칭 ‘국민보도연맹’은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모방한 것이다.

6.25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게 무차별 검속(檢束)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대부분 평택 이남 지역에서 발생했으며, 전쟁중에 벌어진 최초의 민간인 집단학살이다.

► 참고사진

또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발생했던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요 원인이 됐다.

1950년 7월21일 경북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 야산에서 200명, 영순면 포내마을 뒷산에서 300명, 김천시 구성면에서 300명 등 김천지역 1천명(추산) 등 전국 각 지방별로 부지기수다.

이들 가운데 좌익 경력이 없으면서 친구나 주위의 권유로 보도연맹 입맹원서에 단순히 서명한 이유로 끌려가 희생된 양민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 오산 또한 보도연맹 사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오산지역 몇몇 자연부락이 한날 ‘떼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국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사건은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수차에 걸쳐 보도됐으나, 오산지역은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전쟁통에 보도연맹이란 미명으로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을 잃은 가족들은 강산이 수없이 바뀐 지금 멈춰진 시간속에 살고 있다.

오산 누읍·가수·금암 등 3개 자연부락 40가구에게 매년 음력 5월17일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부모형제의 ‘떼제삿날’이다.

아무런 이유도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군·경에게 어디론가 끌려가 무참히 학살된 것이다.

이장집 명단에 이름이 올랐거나 ‘인민군이 시킨 부역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았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양민이나 농사를 짓는 청·장년들로 보도연맹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 6.25한국전쟁 당시 조부, 부친, 숙부 등 일가족 3명을 잃은 유태승씨

당시 5살 무렵이던 유태승씨(74)는 조부(유정노·70대 초반), 부친(유헌진·30대 중반), 숙부(유우진·20대 초반) 등 일가족 3명이 희생된 후손으로 잊혀지는 그 날의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수년전부터 국가기록관 등을 찾으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또 유태승씨 친구로 부친(유병국)을 잃은 유을로씨(74)를 비롯한 유태긍씨(부친 유회진), 유양순씨(부친 유태정) 등 3명도 아버지가 희생된 아픈 기억속에 오늘을 살고 있다.     

아울러 서1리를 비롯한 근동에서 몇몇 양민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때와 장소가 확인되지 않은 희생양이 됐다.   

유씨 일가족 3명이 희생된 서1리(일명 서녘말)는 창원 유(兪)씨 집성촌.

유태승씨는 초대 민선 오산시장에 당선된 뒤 1995년 7월1일~이듬해 9월16일까지 불과 1년3개월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으로 시장직을 마감한 유태형 前 시장의 동생이다.

유 前 시장은 의욕적으로 시정을 맡아 수행했으나 뜻하지 않은 지병이 악화되면서 안타깝게 향년 54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유태승씨는 “6.25한국전쟁 당시 5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일말의 기억 조차 없지만, 조부·부친·숙부 등 3명이 아무런 이유없이 누군가에게 끌려갔고 끝내 돌아 오지 못했다” 며 “이 분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희생된는지 진실 규명과 함께 후손으로서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주어진 사명감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유태승씨는 “오산시, 국가기록관 등 해당 기관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관련자료 미비 등으로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며 “국가 차원에서 진실 규명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실한 기록관리도 문제다.

유태승씨 호적등본에서 심각한 오류(誤謬)가 발견된 것이다.

호적상 단기 4212년(서기 1879년) 1월13일 출생한 조부가 단기 4287년(서기 1954년) 9월10일에, 단기 4253년(서기 1920년) 7월13일 출생한 부친이 단기 4278년(서기 1945년) 8월9일에, 단기 4262년(서기 1929년) 4월4일 출생한 숙부는 단기 4279년(서기 1946년) 10월10일 각각 사망으로 기록된 것이다.  

한날한시 보도연맹에게 끌려간 조부·부친·숙부 등 3명이 호적등본상 사망년도가 제각각은 물론 심지어 부친 사망년도가 조부 사망년도에 무려 9년을 앞서 표기됐다.

아무리 전쟁을 겪은 혼란기에 관공서에서 누군가 급조한 것이겠지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기록이다.

이 또한 국가차원에서 바로잡아야 할 대목이다.             

이와 함께 오산 누읍·가수·금암리 등 3개 자연부락은 멈춰버린 시간속에 한날 ‘떼제사’를 지내는 고통과 아픔이 서린 곳이다.   

► 왼쪽부터 이기호씨, 이정일씨, 故 이정묵씨(사진은 2014년 육성증언)

이기호씨(89)는 6.25한국전쟁 난리통에 보도연맹으로 몰린 20대 중반의 형을 잃었다.

“어느 날 누군가 집에 찾아 와 ‘비료를 나눠 준다’고 해서 도장을 찍어 줬는데, 곧바로 형이 끌려갔고 며칠 뒤 수소문 끝에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형의 시신을 수습해 마차로 실어 왔다”(2011년 육성증언)

또 이정일씨(82)는 서른 다섯살 아버지와 마을 구장(이장)을 봤던 큰아버지를 한꺼번에 여의었다.

그는 여나무살 안쪽 나이였지만 싸늘한 주검으로 맞은 아버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몇년전 작고한 이정묵씨(前 오산시의원)는 당시 겨우 스물 아홉살이던 아버지와 생이별을 했다.

그는 “당시 너댓살적이라 기억은 흐릿하지만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는 크나 큰 설움이자 슬픔으로 삶을 짓누르고 있다”고 말했다.(2011년 육성증언)

그나마 다행히 이들의 시신이 수습될 수 있었던 건 집단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 온 이기호씨 6촌 형(당시 20대 후반)이 마을에 알렸기 때문이다.

이미 근동에서 잡혀 온 수십~수백명이 수원시 모처에서 집단으로 총살됐는데, 시신속에 가렸던 6촌 형이 확인사살 과정에서 총검에 찔렸지만 죽은 채로 은신하면서 화를 면한 것이다.

6촌 형은 이 사실을 마을에 알린 뒤 무슨 이유인지 그로부터 행방이 묘연해 졌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공포되고 반민주적·반인권적 공권력 행사 등으로 은폐된 진실을 밝히기 위한 독립적 국가기관 진실화해위원회(眞實和解委員會)가 활동했으나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다.

6.25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지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사건은 무고한 민간인까지 제물로 삼았다.

오산은 5개~7개 자연부락에서 농민 등 양민 5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무고하게 희생된 부모형제가 편히 쉴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정확한 진실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등 합당한 조치가 실행돼야 한다”고 유족들은 촉구하고 있다.

한편 6.25한국전쟁 당시 최소한 100명 안팎의 민간인들이 집단처형된 여주지역의 경우 2013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6부(지상묵 부장판사)는 Y씨 등 65명이 제소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14억9천90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36년간 억압된 일제 강점기에서 광복(光復)을 맞았으나, 몇년 지나지 않아 발발한 1950년 6.25한국전쟁은 이 땅 한반도를 지금까지 남과 북으로 갈라 놓고 있다.    

이념대립, 사상괴리를 넘어 삼천리 금수강산에 ‘자유와 평화’가 넘실대는 꽃망울이 언제쯤 활짝 터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